칼럼 제565호
나는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지금부터 18년 전인 2003년에 한국으로 왔다. 도착 후 5년이 지나 충청북도 남자와 결혼해 여느 부부처럼 티격태격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남편은 나 때문에 늘 좌불안석이다.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들이 받는 차별과 편견으로 내가 혹시 무시당하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탈북민 관련 부정적 이슈를 접하면 나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 때마다 “당신은 밖에서 북한 사투리 쓰지 말고, 절대 북한에서 왔다는 말 먼저 하지 마세요”라고 당부한다.
일곱 살 된 아들과 함께 한국에 온 나는 신문 배달부터 시작했다.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방에 임대아파트를 배정받자마자 새벽부터 돈 벌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 낮에는 회사일, 퇴근 후 아르바이트,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하루 세 시간을 자고 일 년 내내 쉬는 날 없이 일에 파묻혀 살았다.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다. 남들이 한 걸음 걸을 때 나는 백 걸음, 천 걸음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 신문 배달료로 20만 원을 받아들었을 때의 감격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도 편견이라는 사회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때도 많았다. 북한 사투리에 대뜸 표정부터 바뀌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을 땐 죄지은 사람 마냥 왜소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외래어를 알아듣지 못해 무시하는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존재는 물 위에 떠 있는 기름과도 같았다. “굶어 죽는 나라에서 한국으로 왔으니 용 됐네” 하며 비웃는 회사 동료로부터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때 상했던 자존심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 정착 초기에는 이런 일들이 심심찮았다. 그때마다 나는 치솟는 울분 때문에 어찌할 줄 몰랐다. 자격지심도 생겼었다. 젓가락을 입에 물고 발음을 교정하는가 하면, 모르는 단어가 들리면 남몰래 메모해서 찾아보았다. 북한에서 온 티를 내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삶이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면서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수천 번도 더 넘게 다짐했다.
남한에서의 내 삶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치 갓난아기가 옹알이하고,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는 것처럼. 34살이 되어 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주위엔 “그 나이에 대학 공부를 해서 어디 쓸 거냐?”고 핀잔주는 사람들뿐이었지만 나는 결심했다. 그 누구도 배우겠다는 내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기’로 시작한 대학 공부였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도 벌어야 했다. 그만큼 공부가 만만치 않았다. 만족스럽지 않은 성적을 받을 때마다 ‘포기’라는 유혹이 나를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일도 많았다. 겉으로는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문득 내 영혼이 텅 비어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멈추면 죽을 것 같아 달리기만 했던 나.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한국 사회 속에 끼어들기 위해 안달했던 내 자신. 괜찮은 척, 힘들지 않은 척, 몰라도 아는 척 안간힘을 다하며 이겨내려고 했던 내 모습이 대견스러워 또 안쓰러워 눈물을 펑펑 쏟았던 적도 많았다.
자존심이 상해서, 울화가 치밀어서 시작했던 공부가 이제는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인문학 동아리’에서 틈틈이 읽었던 책은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배울수록 자신감이 배어났다. 돈으로 채울 수 없었던 내 마음의 공간에 배움이 자신감을 차곡차곡 채워주었다. 배우고, 읽고, 쓰면서 조금씩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이제는 웬만해서 상처받지 않는다. 그만큼 마음의 근육도 단단해졌다. 지난 18년 동안 나의 길을 개척해 온 자신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좌충우돌 부딪히며 살아가는 삶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만은 나의 고생은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는 보람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에 정착한 삶에서 한 가지 가슴팍의 비수로 꽂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탈북민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아는 것이 힘이다. 제도적인 교육이든, 비제도적인 교육이든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한국 사회의 시민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배움이 필수적이다. 몰라 마음이 위축될수록 더 많이 묻고 배워야 한다. 남한은 의지만 있으면 배울 곳이 넘쳐나는 나라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배우고 깨친다. 내 삶의 목표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낀다. 불안감도 많이 줄었다. 배움이 즐거움이다.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을 할 때 그 과정이 비록 힘들더라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남편은 그런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오늘도 나는 배움을 향한 걸음을 걷고 있다.
조현정 이음연구소 소장
입력: 2021. 08. 09
출처: http://www.kolofo.org/?mcd=sub03_01&me=bbs_detail&idx=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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